요한은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1절) 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자신의 긴 삶을 돌아보며 그를 이은 젊은 신앙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지 먼저 생각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는데, 지금이야말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되새길 때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예수님 한 분이 홀로 그 심판을 모두 맡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의 고통,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죄인으로 심판받지 않게 되었습니다만, 그렇게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지금 살아 가고 있는 것입니다.
1절 후반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1b-2절)
여기서 우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다”고 말하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간주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우리는 죄인인 채로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독생자 예수님의 고귀한 속죄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간주해 주시는 것입니다. 양자로 하나님의 가족에 영입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 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아버지이신 하나님도 형제인 예수님도 실제로는 본 적이 없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만진 적도 있지만 아버지 하나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것입니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셨을 때 자신들이 예수님을 닮은 자가 되는 것이라는 것뿐입니다. 그것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계속 살아간다면 예수님의 깨끗하심처럼 우리도 깨끗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2~3절에서 말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4절에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4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고대에 “법”이라는 것은 모세의 율법도 석판에 기록되었는데, 석판이나 석주에 새겨진 “비문”과 같은 것을 의미했습니다. 예를 들어 고대 법전으로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이 있는데, 이 법전은 높이가 2m 25cm인 돌기둥에 새겨져 바빌로니아 제국의 네 귀퉁이에 건립되었습니다. 이 돌기둥으로 둘러싸인 곳이 바빌로니아 제국의 영토, 왕의 통치하에 있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고대의 “법”이란 국민으로 하여금 그 법의 조문을 지키게 하고 충성을 맹세하게 하며 내정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바깥세상을 향해 주권이 누구에게 있으며 그 세력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고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법의 안쪽에 사는 사람에게는 그 법에 따른 보호가 주어지지만(물론 의무도 부과되지만) 그 바깥쪽은 더 이상 그 법의 지배가 미치지 않는 다른 세계라는 것의 경계를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죄라는 것은 법의 조문을 지키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법의 바깥으로 나가 버리는 것, 그 법이 지배하는 범위 밖으로 나가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냐면 요한은 이 “법”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제시하신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6절에 “그 안에(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라고 되어 있는데 신앙인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고 끊임없이 보호를 받고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법을 지킨다” 라고 하면 우리는 바로 그 법의 조문을 위반하지 않고 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라면 하나님의 규칙, 예를 들면 율법이라든지 오늘 말씀으로 하면 “서로 사랑한다” 라든지 그런 조문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 예수님의 은혜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점을 1절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1절)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고 있는 자가 곧 예수님을 아는 자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입니다. 반대로 이 하나님의 사랑 밖에 있는 자는 죄를 짓는 자이며 마귀에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고 있는, 즉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자는 그 사랑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로 요한은 9절에서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거함이요”(9절) 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 죄인의 현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씨”가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씨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살리는 생명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씨”란 우리에게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과 말씀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씨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과 말씀이 우리 안에 항상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아 있음을 자각하고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요, 죄를 지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완전히 그렇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예수님을 우리가 보고 예수님을 닮은 자가 될 때입니다. 그런데도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요한의 말씀을 희망찬 약속의 말씀으로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닮은 자가 될 것을 믿고 형제를 사랑하는 자가 됩시다.
2023年3月19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ヨハネ(요한복음) 1章 12~13節
〇讃 頌 讃頌歌 25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127 (四旬節 ④ )
〇讃 頌 讃頌歌 146
〇聖書奉読 ヨハネの手紙一(요한일서) 3章 1~10節
〇説 教 「神から生まれた人(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80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2
〇祝 祷
【 2023年 3月 19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神から生まれた人」 ヨハネ一 3章 1~10節
ヨハネは「御父がどれほどわたしたちを愛してくださるか、考えなさい」(1節)と言います。ヨハネは自分の長い人生を振り返りながら、彼に続く若い信仰者たちに、神さまがどれほど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ているかを、まず考えなさいと勧めています。
今、私たちは四旬節を歩んでおりますが、主イエス・キリストの苦難を思い起こす時です。イエスさまの苦しみは、私たちの罪を赦すために、イエスさまお一人がその裁きをすべて引き受けてくださったからです。神さまの独り子であるイエスさまの苦しみ、十字架上での死があるがゆえに、私たちは罪人として裁かれることがなくなったわけですが、そこまで神さまは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ね。この神さまの愛の中で、私たちは今生かされているのです。
1節後半をご覧下さい。「それは、私たちが神の子と呼ばれるほどで、事実またそのとおりです。世がわたしたちを知らないのは、御父を知らなかったからです。愛する者たち、私たちは、今既に神の子ですが、自分がどのようになるかは、まだ示されていません。しかし、御子が現れるとき、御子に似た者となるということを知っています。なぜなら、そのとき御子をありのままに見るからです。」(1b-2節)
ここで、まず、神さまの愛というものが、「私たちが神の子と呼ばれるほど」と言っています。神さまは私たちを神の子としてくださったということですね。ただ、「神の子と呼ばれるほど」と言っていることに注意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私たちは神の子と見なされているわけですが、実際には神の子ではありません。私たちが神になれるわけではないのです。どこまでいっても私たちは罪人のままなのです。それが独り子イエスさまの貴い贖いによって、私たちを神の子と見なしてくださっているのです。養子として神の家族に迎え入れられたのです。神さまの大きな愛の中に入れられました。
とは言え、私たちは父である神さまも兄弟であるイエスさまも実際には見たことがないのです。ヨハネはイエスさまを見てさわったこともありますが、父なる神さまを見たことがないのです。ですから、これから先、自分が神の子としてどうなるのかはわからないのです。ただ、言えることは、御子イエスさまが再び来られた時に、自分たちがイエスさまに似た者になること、ということだけです。そのことを信じ、神さまの愛の中で生き続けるならば、イエスさまが清いように自分たちも清められるということです。それが2~3節で言われている内容です。
それから4節に、「罪を犯す者は皆、法にも背くのです。罪とは、法に背くことです」(4節)とあります。古代において「法」というのは、モーセの律法も石板に記されましたが、石板や石柱に刻まれた「碑文」のようなものを意味していました。例えば、古代の法典として有名な「ハンムラビ法典」がありますが、この法典は高さは2m25cmの石柱に刻まれ、バビロニア帝国の四隅に建立されました。この石柱に囲まれた所が、バビロニア帝国の領土、王の統治下にあることを、公に宣言する意味合いを持っていました。
つまり、古代の「法」とは、国民にその法の条文を守らせ、忠誠を誓わせ、内政の秩序を保つためというよりも、外側の世界に向かって、主権が誰にあり、その勢力範囲がどこまでに及ぶのかを公に宣言し、告知するためのものだったのです。ですから、法の内側に住む者には、その法に則った保護が与えられますが(もちろん、義務も課せられますけど)、その外側は、もはやその法の支配の及ばない異世界であることの境界を示すものだったのです。ですから、「罪」というのは、法の条文を守らないことではなくて、その法の外側に出てしまうこと、その法の支配する範囲の外に出てしまうことを意味するものだったのです。
何が言いたいのかと言いますと、ヨハネは、この「法」を神さまの愛と捉えていて、神さまの愛を示されたイエスさまの内(内側)にいることの大切さを語っているのです。6節に「御子の内にいつもいる人は皆、罪を犯しません。罪を犯す者は皆、御子を見たこともなく、知ってもいません」とありますが、信仰者は神さまの愛の内側にいて、絶えず守られている者たち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
「法を守る」というと、私たちはすぐに、その法律の条文に違反しないで生きることと考えます。教会の中でしたら、神の掟、例えば律法とか、今日の御言葉で言いましたら「互いに愛し合う」とか、そういった条文を守ることと考えますが、それよりも大事なことは、私たちが主イエスさまの恵みの内に生かされていることを意味しているのです。だから、ヨハネはキリスト者の生き方の原点を、まず、先程の1節で示しているのです。「御父がどれほどわたしたちを愛してくださるか、考えなさい。それは、わたしたちが神の子と呼ばれるほどで、事実また、そのとおりです。」(1節)
神さまの愛の内に生きている者が、すなわち御子イエスさまを知っているものであり、神さまから生まれた者なのです。反対に、この神さまの愛の外側にいる者は、罪を犯す者であり、悪魔に属している者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
神さまの愛の内に生きている、すなわち御子イエスさまの十字架によって示された神さまの愛を信じている者は、その愛のゆえに罪を犯しようがないと言っているのです。その理由としてヨハネは9節で「神の種がこの人の内にいつもあるからです」(9節)と言っています。私たちはイエスさまを信じたからと言って、罪を犯さないで生きて行くことは出来ません。それが私たち罪人の現実です。それでも私たちには「神の種」が与えられているのです。
「神の種」とは、私たちを神の子として生かす命のことです。そして、「神の種」とは、私たちに与えられているイエス・キリストの聖霊と御言葉のことです。神の種であるイエス・キリストの聖霊と御言葉が、私たちの内にいつもあるならば、私たちは神の愛の内に生かされていることを自覚し、罪を犯さないようになるのです。いえ、罪を犯すことができなくなるのです。実際に私たちが完全にそのようになるのは、イエス・キリストが再び来られ、御子イエスさまを私たちが見て、御子に似た者となる時です。それでも、ヨハネは「神から生まれた人は皆、罪を犯しません」と言うのです。
皆さん、このヨハネの言葉を希望に満ちた約束の言葉として聞きたいと願います。私たちもイエスさまに似る者になることを信じて、兄弟を愛する者になりたいと願います。
【2023년 3월 19일 주일예배(요약판)】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 요한일서 3장 1~10절
요한은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1절) 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자신의 긴 삶을 돌아보며 그를 이은 젊은 신앙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지 먼저 생각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는데, 지금이야말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되새길 때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예수님 한 분이 홀로 그 심판을 모두 맡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의 고통,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죄인으로 심판받지 않게 되었습니다만, 그렇게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지금 살아 가고 있는 것입니다.
1절 후반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1b-2절)
여기서 우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다”고 말하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간주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우리는 죄인인 채로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독생자 예수님의 고귀한 속죄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간주해 주시는 것입니다. 양자로 하나님의 가족에 영입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 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아버지이신 하나님도 형제인 예수님도 실제로는 본 적이 없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만진 적도 있지만 아버지 하나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것입니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셨을 때 자신들이 예수님을 닮은 자가 되는 것이라는 것뿐입니다. 그것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계속 살아간다면 예수님의 깨끗하심처럼 우리도 깨끗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2~3절에서 말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4절에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4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고대에 “법”이라는 것은 모세의 율법도 석판에 기록되었는데, 석판이나 석주에 새겨진 “비문”과 같은 것을 의미했습니다. 예를 들어 고대 법전으로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이 있는데, 이 법전은 높이가 2m 25cm인 돌기둥에 새겨져 바빌로니아 제국의 네 귀퉁이에 건립되었습니다. 이 돌기둥으로 둘러싸인 곳이 바빌로니아 제국의 영토, 왕의 통치하에 있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고대의 “법”이란 국민으로 하여금 그 법의 조문을 지키게 하고 충성을 맹세하게 하며 내정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바깥세상을 향해 주권이 누구에게 있으며 그 세력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고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법의 안쪽에 사는 사람에게는 그 법에 따른 보호가 주어지지만(물론 의무도 부과되지만) 그 바깥쪽은 더 이상 그 법의 지배가 미치지 않는 다른 세계라는 것의 경계를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죄라는 것은 법의 조문을 지키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법의 바깥으로 나가 버리는 것, 그 법이 지배하는 범위 밖으로 나가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냐면 요한은 이 “법”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제시하신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6절에 “그 안에(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라고 되어 있는데 신앙인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고 끊임없이 보호를 받고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법을 지킨다” 라고 하면 우리는 바로 그 법의 조문을 위반하지 않고 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라면 하나님의 규칙, 예를 들면 율법이라든지 오늘 말씀으로 하면 “서로 사랑한다” 라든지 그런 조문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 예수님의 은혜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점을 1절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1절)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고 있는 자가 곧 예수님을 아는 자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입니다. 반대로 이 하나님의 사랑 밖에 있는 자는 죄를 짓는 자이며 마귀에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고 있는, 즉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자는 그 사랑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로 요한은 9절에서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거함이요”(9절) 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 죄인의 현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씨”가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씨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살리는 생명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씨”란 우리에게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과 말씀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씨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과 말씀이 우리 안에 항상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아 있음을 자각하고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요, 죄를 지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완전히 그렇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예수님을 우리가 보고 예수님을 닮은 자가 될 때입니다. 그런데도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요한의 말씀을 희망찬 약속의 말씀으로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닮은 자가 될 것을 믿고 형제를 사랑하는 자가 됩시다.